팔스타프에 대하여

 

 

글쓴이: 장일범


<뚱보 기사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다시 세상에 태어난 돈 조반니. 그가 윈저의 시민들에게 허영과 자만에 찬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풍자의 거울에 비춰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4세’에서 폴스타프는 “나는 스스로 기지에 넘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지를 갖게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주세페 베르디는 폴스타프의 이 말을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오페라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과 창작이 걸어온 비극적 여정에 호탕한 풍자의 옷을 입힌다. 팔스타프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계의 전형인 윈저의 소시민 세계에서 모든 존재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북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팔스타프를 향한 첫 번째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격을 느긋한 자세로 막아낸다. 혼돈과 소동이 그의 뚱뚱한 배에 부딪혀 나가떨어진다. 그의 배는 베르디에 의해 힘찬 공명체가 되어 그의 음악 안에 포함된다. 이로써 팔스타프는 처음부터 독특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베르디는 그에게 저음의 콘트라베이스로부터 고음의 플루트로 상승하는 음악적 주제를 부여한다. 그로써 전체 오케스트라가 팔스타프의 편이 된다. 베르디가 한 인물에게 이보다 더 분명한 지지의 태도를 보여준 적은 없을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진 이 뚱보 기사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자신하며 유한부인들인 앨리스 포드와 메그에게 똑같은 내용의 연애편지를 한 통씩 써서 보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경건한 체하며 명예를 내세우는 두 부하의 저항에 부딪힌다. 팔스타프는 아리아도 아니고 레치타티보도 아닌 긴 독백의 노래로 명예라는 위선적인 개념에 맹공을 퍼부어 텅 빈 껍데기만 남게 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기 일을 꾸미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오직 팔스타프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는 그들 앞에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때에도 수시로 그들의 머리 속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로서 경이로운 테마가 아닐 수 없다. 텍스트에서는 두 통의 연애편지에 대해 앨리스 부인이 분개하는 내용이 다루어진다. 하지만 잉글리시 호른의 선율은 그 편지가 그녀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열망의 불씨를 던져놓았음을 분명히 들려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돈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난네타와 펜톤의 사랑만이 그 혼돈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이 두 연인의 노래는 줄곧 “키스하지 않을 수 없는 달콤한 입술”의 선율이 되어 하나로 합쳐진다. 팔스타프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곤경에도 식을줄 모르는 영원한 에로스의 화신이라면, 난네타와 펜톤은 이제 막 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한 풋사랑을 상징한다. 베르디는 둘을 이 희비극의 중심기둥으로 삼아 윈저 시민들의 비대한 삶과 허위 도덕을 사랑으로 물리친다.

세 번째 장에서는 윈저 사람들이 팔스타프를 그들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찾아온다. 먼저 퀴클리 부인이 나타나 앨리스가 팔스타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 통보를 한다. 그는 어떤 모험도 사양하지 않는다. 위험이 없다면 인간의 삶과 사랑이란 무의미한 것이므로.

앨리스의 남편 포드는 팔스타프로 하여금 앨리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폰타나라는 이름의 부유한 시민으로 변장하고 그에게 앨리스와 밀회를 주선해 달라고 청한다. 이때 그의 아리아 끝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가 산산이 부서져내리는 참담함을 겪는다. 이 아리아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편에 속할 것이다. 포드는 충격속에 돌처럼 굳어버린 반면 -오케스트라에서는 아내의 불륜에 넋이 나간 남편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 팔스타프는 ‘가자.이 늙은 존아’라는 선율과 함께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되어 훨훨 날아갈 듯하다. 사랑의 모험으로 부푼 기대감만큼 그를 젊게 하는 것은 없다.

4장이 시작되자 마자 팔스타프는 곧바로 앨리스 포드에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노퍽 공작의 시동’이었던 젊은 시절에 대한 25소절의 짧은 노래를 부르며 팔스타프는 경쾌한 선율과 함께 매순간 조금씩 젊어지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음악의 힘을 통해 믿음직스런 유혹자가 된다. 그래서 메그와 퀴클리 부인이, 그리고 곧이어 격분한 포드가 이끄는 윈저 시민들이 들이닥쳐 이 두 사람의 밀회를 방해하지만 그리 큰 일은 아니다.

이야기는 이 작품의 전환점이 되는 4장의 피날레 부분에서 절정에 이른다. 장면을 마비시키는 정적이 흐른 후 광란의 폭력이 터져나오는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결국 집단 히스테리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베르디에게는 텅 빈 무대 위에 빨래 바구니 외에 병풍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팔스타프 제거’라는 극적인 작전이 숨가쁘게 진행되는 동안 병풍 뒤에서는 난네타와 펜톤이 영원히 계속될 듯한 키스에 열중하고 있다. 팔스타프는 혼돈이 극에 달한 순간 빨래 바구니와 함께 템스 강 속으로 내던져진다. 그는 좀 다쳤을 뿐 부러지지는 않은 채로 다시 물에서 살아나온다. 제5장이 시작되면 퀴클리 부인이 다시 팔스타프 앞에 나타나 앨리스는 여전히 그를 원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윈저 사람들이 이제 팔스타프를 다시 함정에 걸려들게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음악은 밤과 낮,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악기와 목소리들이 해체되는 듯이 보인다. 윈저 사람들은 제2의 ‘한여름밤의 꿈’이라 할 한밤중의 도깨비 장난 속으로 빠져든다.

요정과 도깨비들이 등장하는 거친 환상극을 선호하는 베르디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팔스타프가 한밤중에 전설 속의 사냥꾼 헤르네의 떡갈나무 아래 나타나는 장면은 무엇보다도 바람난 주피터 신의 신화를 새롭게 꾸며낸 것이다. 팔스타프는 이제 가면을 벗은 에로스가 되어 시민들의 도덕을 전보다 더 우습게 여긴다. 그는 앨리스와 메그에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제단위의 숫염소처럼 사지를 찢어 죽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윈저의 시민들은 완전히 궤도를 이탈한 방종을 즐기며 베르디가 풍자적인 시편 낭송 톤으로 작곡한 어둠의 미사를 올린다. 강력한 화음과 함께 팔스타프는 한바탕 몰이사냥을 마무리하며 소동을 끝낸다. 무대는 이제 팔스타프를 없앨수 있다고 생각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과 최종담판을 벌이기 위한 자유 공간이 된다.

팔스타프는 오페라 끝부분에서 세상사의 이치를 노래하는 푸가를 한편 부른다. 윈저 사람들은 사실 꼭두각시들이다.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팔스타프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푸가 속의 영도자의 말에 어떤 조건이나 이의도 달지 않고 그대로 따를 때에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이제 비로소 베르디가 이 오페라를 통해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이 독특한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베르디는 푸가곡 ‘세상사 모두가 익살극이고 인간은 광대로 태어났다네’에서 ‘인간’이라는 단어에 두드러지게 긴 음을 부여한다. 세상 모든 일은 언제 어디서든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 팔스타프는 마지막 순간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린 듯이 보이지만 윈저 사람들이 이제 좀 편히 살게 되었다 싶을 때면 언제든 다시 나타나 훼방꾼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모두 장난일 뿐! 늙은 뚱보 팔스타프의 연애 헛소동


1871년 ‘아이다’를 초연한 이후 절필하고 고향 부제토의 산타가타 마을에 농부가 되어 한가로이 칩거중이던 베르디. 그를 삼고초려 끝에 다시 책상앞에 앉게 만든 청년 작곡가이자 오페라 대본작가(librettist)가 아리고 보이토였다. 그는 베르디 만년 음악인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후배였는데 결국 16년 만에 베르디로 하여금 ‘오텔로’를 작곡하게 만들어 초연에 성공시켰다. 이에 멈추지 않고 보이토는 이번에는 베르디의 ‘오텔로’ 프랑스어 버전을 각색 작업하면서 슬쩍 베르디에게 세익스피어의 ‘헨리 4세’와 ‘헨리 5세’의 끝 부분,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에 등장하는 뚱뚱보 기사 팔스타프에 대한 생각을 내비쳤다. 대본을 받아든 셰익스피어를 매우 좋아하던 베르디는 열렬한 찬사를 보내며 보이토에게 “이틀 전에는 꿈속에 있었던 이 작품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있다니, 아멘! 팔스타프 합시다.” 이렇게 선언했다. 결국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는 이렇게 닻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젊은 시절부터 셰익스피어에 경도되어 있었고 잠잘 때에도 늘 머리맡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끼고 잤던 베르디는 1867년 ‘맥베스’를 성공시킨 이후에도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을 계속 오페라화하고 싶어했다. 그는 ‘햄릿’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결국 쓰지 못했던 ‘리어왕’은 그의 평생의 테마였다.

베르디는 리어왕 대신 대본을 거머쥔 팔스타프를 선택했다. 베르디와 보이토는 이 작품을 ‘배불뚝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베르디는 지금까지 자신이 썼던 피비린내 나는 또는 슬픔에 휩싸여 죽어가는 비극적 결론의 오페라 세리아와는 전혀 다른 작품을 쓰는 것에 대해 매우 신나하면서 청년처럼 이 작품을 써내려갔다.

베르디는 1839년 비극 ‘오베르토’를 첫 작품으로 쓰고 난 이후 오페라 부파 '하룻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을 1840년에 두 번째로 썼는데 그후 50년 만에 25편의 비극들을 더 쓰고 난 이후 마지막 오페라가 된 두 번째 부파 작품 ‘팔스타프’를 쓰게 된 것이었다. 평생 비극만 썼지만 코믹 오페라도 쓰고 싶어했던 그에게 반세기만에 다시 쓰게 된 기회였다. 하지만 50년 전에 쓴 자신의 실패작 ‘하룻만의 임금님’의 초연을 지켜본 사람이 이제 그의 곁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제자이자 비서, 헌신적인 친구였던 무쪼(Muzio)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80세가 되었어도 베르디는 여전히 작업에 있어 타협할 줄을 몰랐다. 라 스칼라에서 리허설 할 때 마음에 안드는 가수를 바꿀 권리와 확실한 총연습 등 그는 꼬장꼬장하게 모든 걸 다 따졌다. 1892년 여름 7월 18일 결국 베르디는 팔스타프 악보를 리코르디사에 넘겨주었고 악보의 마지막 페이지를 자신의 주인공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로 적었다. “가라 존, 다른 시대나 다른 장소에서 네가 쓰게 될 가면을 걸치고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너의 길을 가라...”

바로 2막 1장에서 자신이 속는 지도 모르고 승리의 환호를 외치며 포드 부인인 알리체를 차지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푼 허풍선이 팔스타프가 부르는 아리아의 한 구절이었다. 리허설 때도 80세의 총기 넘치는 베르디는 지칠 줄 모르며 하루에 6시간에서 8시간을 라 스칼라에서 리허설과 함께 보냈다. 종종 화도 냈지만 변함없는 활력으로 다시 작업에 빠져들어갔다.

1893년 2월 9일 초연 날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혹시 남는 표가 있을까 서성이는 밀라노 오페라 팬들로 장사진을 이룬 가운데 첫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각 막이 끝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마침내 공연이 끝나자 계속되는 앙코르 요청에 베르디는 보이토와 함께 무대에 나갔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환호성과 박수는 베르디가 묵고 있던 그랜드 호텔 밖까지 이어져서 베르디는 몇 번이나 호텔 발코니에 불려나와야만 했다. ‘팔스타프’는 곧바로 이탈리아 전역의 모든 극장에서 상연되는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고 모든 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하룻만의 임금님’이 라 스칼라에서 상연 실패한 후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80대에 들어선 노대가 베르디는 자신에게 익숙치 않았던 장르인 오페라 부파에서 멋지게 설욕을 한 것이었다. 팔스타프는 로시니가 만년에 썼던 오페라 ‘돈 파스콸레’와 일맥상통한다. 오페라 부파지만 마냥 웃기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간 가장 심연의 비밀과 우수, 쓰라림 이 모습은 베르디의 겸손한 자화상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인생에 대한 씁쓸한 거울과도 같다. 모든 사람이 팔스타프를 골탕먹이고 골려주는 장면은 재미있으면서도 젊은 노리나에게 당하는 돈 파스콸레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되어 안쓰럽고 씁쓸하다. 팔스타프는 로시니나 도니제티의 희곡처럼 무작정 웃기는 것이 아니라 페이소스로 넘쳐난다. 코믹 오페라에 담긴 연민이다. 이것은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조반니’ ‘여자란 다 그래(Cosi fan tutte)같은 모차르트 작품들과 더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늙은 뚱보 기사 존 팔스타프는 돈이 궁해지자 포드 부인 알리체와 메그 페이지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두 부인은 퀴클리 부인의 도움으로 팔스타프를 혼내줄 계획을 세운다. 남편 포드와 부인들이 짠 각각의 계획 속에 당하며 우여곡절 끝에 템즈강에 던져진다. 한탄하는 팔스타프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권유에 따라 다시 사슴복장을 하고 알리체를 만나러 간 팔스타프는 윈저사람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당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혼내주려는 장난임을 알고 용서를 구하며 콘체르타토를 함께 부르며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다.

오페라 ‘팔스타프’의 즐거움중 하나는 ‘세상은 다 아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는 것에 대한 우스꽝스러움과 즐거움이다.’ 즉 ‘착각은 자유’다. 욕심많고 아직도 자신을 청춘이라고, 인기있다고 믿고있는 팔스타프는 돈키호테처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었다. 팔스타프의 ‘위대한 착각’인 것이다. 그래서 청중들은 이 배가 술통처럼 나온 뚱보에 어처구니 없고 귀엽기까지 한 작전을 짜고 행동으로 옮기는 허풍선이 팔스타프를 좋아한다. 그는 미워할수 없는 아저씨!인 것이다.

너무나 뚱뚱해진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등장인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늘의 천벌을 받아라’라며 비판받는 장면에서 조차 “제발 뱃살만은 그대로 놔두소서!” 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의 엄청난 뱃살을 사랑하는 모습에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어떻게 찐 살인데’라며 아까워하는 모습. 젊은 시절에 비해 더 뚱뚱하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불평하고 낙담하기도 하지만 팔스타프는 자신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다.

팔스타프는 결국 모든 것을 깨닫고 체념하며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부질없는 것이야! 장난이야! 다 우스운 것이야!”(Tutto nel mondo e burla)라며 이 오페라의 막을 내린다. 얼마전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감독을 19년 간이나 역임하며 빈국립오페라를 유럽 최고의 오페라 극장으로 끌어올린 요안 홀랜더는 자신과 한 시대를 같이 했던 스타 성악가들이 함께 참여해 3시간 동안 펼쳐준 ‘고별 콘서트’의 마지막을 ‘팔스타프’의 이 피날레 장면으로 택했고 바리톤 레오 누치가 팔스타프 역을 부르며 홀랜더는 무대 뒤로 퇴장했다. 그럴 만큼 ‘팔스타프’라는 작품은 코미디 속에 인생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난 스스로 기지에 넘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지를 갖게 하는 원인이 되고자 한다.” 팔스타프의 원조인 셰익스피어의 존 폴스타프 경은 희극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과 역사극 ‘헨리 4세’의 제1부와 제2부에 등장한다. 거기서 그의 타고난 재치와 본능적 유머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잔인하게 억압당한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불쌍한 바보로 전락하고 무기력한 인간 퇴물로 취급받는다. 그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언어를 상실하고 만다. 베르디에 와서야 비로소 그는 다시 언어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이제 다른 목적에 기여하게 된다. 이제는 팔스타프가 다른 사람들을 농락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멈춰버린 시간


2막 두 번째 장 : 팔스타프는 빨래 바구니 속에 숨고 모두들 그를 사냥하기 위해 혈안인데 난네타와 펜톤은 병풍뒤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갖는다. 요란한 소동이 멈추고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음악도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작품 스스로가 연출을 맡는다. “키스 소리” 이 소리에 포드가 속는다. “너 이놈, 나한테 잡혔다!” 이 말과 함께 피날레의 안단테가 시작된다. 음악이 카메라처럼 사건의 현장을 한 바퀴 빙 돌아 감싼다.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청중들은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듣는다. 이건 오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중심에는 사랑의 커플이 있다. 마치 세상에는 이 두 사람만 존재한다는 듯이. 베르디는 병풍 하나만으로 모든 쾌락은 영원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베르디가 악보에 쓴 자필 글


자네 가고 싶은 대로 가게나.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어디에나 나타나는 이 절대 변치 않을 익살스런 악당아! 가게. 가게. 멀리 가게, 부디 잘 살게나!

-Giuseppe Verdi